SK그룹 최태원 회장의 어머니 이자 노소영관장의 시어머니인 박계희 여사의 인생을 알아보겠습니다.
사랑 그리고 결혼
박계희 여사는 해운공사 사장을 지낸 박경직의 딸로 태어나 유복한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경기여고를 졸업하고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 미술공부를 했습니다. 그러던 중 기숙사 축제에서 시카고대 대학생이었던 최종현을 처음 만나 사랑에 빠지게 됩니다.
최종현은 SK그룹 창업자인 최종건 회장의 동생입니다.
최종현 회장은 박계희 여사를 처음 보자마자 사랑에 빠졌고 둘은 시카고와 뉴욕의 미술관을 다니며 사랑을 키웠습니다. 그렇게 1년간 사귀다 시카고대 근처 교회에서 결혼식을 올렸습니다.
학교 근처 작은 아파트에서 신혼살림을 시작한 학생 부부는 밥만 먹어도 행복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아들 최태원이 태어나고 한국에서 보내주는 돈으로만 살기에는 모자랐습니다.
돈을 보내주던 최종건 회장은 당시 사업확장으로 인해 돈을 넉넉하게 보내 줄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고민 끝에 최종현 회장은 골프 캐디를 시작했고 박계희 여사는 아들 최태원을 업고 다니며 아르바이트를 했습니다.
박계희 여사 입장에서는 미국 유학까지 와서 공부를 포기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남편 최종현이
나만 믿고 따라오라. 나는 거목이 될 테니 그 그늘에 숨어 있기만 하면 된다.
이렇게 말해 그만 넘어갔다고 합니다. 미국에서의 어려운 생활은 계속되었다고 합니다. 그런 경험으로 이들 부부는 매우 검소한 생활이 몸에 배이게 됩니다.
사치품을 사지 않았고 자녀들에게도 검소한 생활방식을 가르쳤습니다. 이 후 최종현 회장은 굴지의 대기업으로 성장한 SK그룹의 회장이 되어서도 검소한 생활을 이어나갔습니다.
내조의 여왕
박계희 여사는 경제인 남편을 내조하고 아이들을 키우며 살았습니다. 아이들에게는 이래라저래라 간섭하는 법이 없었습니다.
학업을 비롯한 모든 일을 스스로 알아서 하도록 했던 것이 박계희 여사의 교육관이었습니다.
그리고 가정환경이 어려운 최태원의 친구들을 직접 초대하여 밥을 지어주는 등 재벌 사모님과는 어울리지 않은 자상함을 보였습니다.
박계희 여사를 아는 사람들은 그녀에 대해 이렇게 회고합니다.
"첫인상은 차가운 듯했지만 알고 보면 그렇게 너그럽고 자상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후 SK그룹에서 진행된 활발한 사회공헌 활동은 박계희 여사의 박애 정신이 투영되었다는 것이 주변 인사들의 이야기입니다.
25년 전 약속
박계희 여사가 자기 길을 찾기 시작한 것은 아이들이 웬만큼 자란 40대 초반이었습니다. 최종현 회장이 " 당신이 공부하면 나도 어깨너머로 배울 수 있겠다."라고 부추겼다고 합니다.
그렇게 동양사 공부를 시작하게 됩니다.
1984년 워커힐미술관을 설립하며 미술 분야에 지원을 시작하였습니다. 남편인 최종현 회장이 25년 전 약속을 지킨 것입니다. 과거 최종현 회장은 이렇게 약속했다고 합니다.
"난 바쁜 사람이니 당신에게 조그만 화실을 지어주겠다."
이후 박계희 여사는 한국 현대미술을 재조명하는가 하며 국내 젊은 작가들을 발굴했습니다. 어느 나라에 가나 미술관부터 찾았고, 많은 자료를 가지고 돌아왔습니다. 외국에서 눈여겨봤던 전시회는 꼭 한국에도 유치했습니다.
김윤순 한국미술관 관장은 그녀에 대해 이렇게 기억했습니다.
재계의 부인과는 거리가 먼 학구파에 가까운 인상이었다. 그녀는 배우는 것을 즐겨하셨다. 동양화론에 실기까지 공부했고 서예도 배웠는데 삼성의 홍라희 관장도 함께 했었다.
나는 재벌 부인인 그녀를 부러워한 적은 없다. 그러나 그녀의 지식과 학구열은 늘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금슬 좋은 부부
최종현 회장과 박계희 여사 이들 부부 사이는 아주 좋은 것으로 유명했습니다. 최종현 회장은 웬만하면 저녁은 집에서 먹었고 주말이면 자녀들을 불러들여 가족과 함께 지내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그래서 최 회장이 가장 좋아하는 음식은 집에서 만든 된장찌개와 김치찌개였습니다. 이들 부부는 오전 시간은 거의 함께 지냈습니다. 아침에 일어나면 함께 스포츠 센터에 가거나 가까운 아차산에 오르고 마주 보며 단전호흡을 했습니다.
일상 업무는 전문 경영인에게 위임하고 전략등 중요한 것만 챙기는 최종현 회장은 점심시간이 되어서야 회사에 나타났습니다. 점심에 최 회장이 출근하면 박계희 여사도 자신의 직장인 워커힐 미술관으로 출근했습니다.
이후 외동딸까지 결혼하면서 부부 단둘이 남게 되자 최 회장은 아내 혼자 집에 두기 미안하다며, 출장 때마다 아내와 동행했습니다.
집안일을 도와주던 집사는 이들 부부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얼마나 대화가 많으시던지요. 단둘이 저녁을 먹을 때도 이야기 꽃을 피우느라 식사 시간이 2시간은 걸렸어요.
박계희 여사의 마지막
그리고 최종현 회장이 폐암 선고를 받자 박계희 여사는 충격을 받고 정신을 잃었습니다. 이후 미국으로 건너가 폐임수술을 받았고 박여사는 남편을 극진히 간호했습니다. 이때 박계희 여사는 식사 한번, 잠 한번 제대로 못 잤다고 가족들이 말했습니다.
이후 최 회장의 수술경과가 좋은 것을 확인하고 숙소로 돌아온 뒤 잠시 눈을 붙였는데 그대로 생을 마감했습니다. 사인은 심장마비였습니다. 정신적 신체적 과로가 결국 사망까지 이르게 한 것입니다.
그리고 담당의사의 권고에 따라 박계희 여사의 사망사실을 최 회장에게 알리지 않았습니다. “엄마는 어디 갔느냐”라고 묻는 최 회장에게 가족들은 한동안 그녀의 죽음을 알리지 못했습니다.
이틀이 지나서야 장남 최태원이 아버지에게 알렸고 최 회장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다음 해 최종현 회장은 박계희 여사를 따라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처럼 박계희 여사는 순애보적인 삶을 살았으며 재벌가 부이 답지 않은 검소한 생활을 하며 지냈습니다. 그리고 회사일에는 일절 관여하지 않고 남편 최종현 회장을 잘 내조했었습니다.
며느리인 노소영 관장에게도 그런 순애보적인 삶을 살라 권했지만 마지막에는 그렇게 살라 한 것을 후회하고 미안해했다고 합니다.
며느리 노소영
이후 박계희 여사가 갑자기 세상을 떠나면서 며느리인 노소영 관장이 미술관을 꾸려나갔습니다. 그전까지 노소영관장은 노태우 대통령의 딸이자 최태원의 부인이라는 이유로 대중에 모습을 드러내길 꺼려했었습니다.
노소영이 처음으로 한 일은 미술관의 15년 사를 펴내는 일이었습니다.
이런 좋은 전시들을 너무나 저렴한 비용으로 했다는 것이 놀라웠습니다. 예술장르의 폭도 넓어 주류미술뿐 아니라 비주류 미술까지도 다루셨습니다.
나를 숙연하게 만든 것은 어머니께서 직접 공부하셨던 '사서삼경'이었습니다. 그냥 독서가 아니라, 페이지마다 빽빽하게 연필로 줄을 긋고, 온갖 주석들을 달아 놓으셨습니다. 내가 가장 소중히 여기는 유물입니다.
그러나 노소영 관장은 박계희 여사의 20주기 추모 전시에는 등장하지 않았습니다. 최태원 회장과 이혼 절차가 진행 중으로 최태원 회장이 전시인력을 직접 꾸렸기 때문입니다.
박계희 여사가 노소영 관장을 며느리로 맞을 때 당부한 한 가지가 있었는데 지켜지지 못했습니다. "절대 구설수에 오르지 말라." 였죠 그러나 최태원 회장과 노소영 관장은 이혼 진행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고 있습니다.
최태원 회장은 한 매체에 "노 관장과 십 년이 넘게 깊은 골을 사이에 두고 지내왔고 노력도 많이 해보았다. 그러나 그때마다 더 이상의 동행이 불가능하다는 사실만 재확인될 뿐 상황은 점점 더 나빠졌다."
이후 최태원 회장은 내연녀 김희영과 함께 지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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