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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의 어린 시절
1931년 1월 18일 경상남도 합천군 출신입니다.
8살 때 전두환의 아버지는 평소 동네 사람들을 괴롭히던 일본인 순사를 벼랑으로 밀어버리는 바람에 만주로 도망쳤고 몇 년 뒤 대구로 돌아왔다고 합니다.
매우 가난하여 보통의 아이들보다 2~3년 늦게 학교에 들어갔습니다. 그 덕에 또래들 사이에서 자연스럽게 리더역할을 했다고 합니다.
그때 평생의 동지인 노태우를 만나게 되고 신문배달 등 아르바이트를 해야 했기에 학업성적은 좋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운동을 좋아해 축구부를 이끌고 동료들을 리드합니다. 그의 리더기질은 어려서부터 있었던 것 같습니다.
1950년 6.25가 터지고 전쟁 중 그는 육사 모집공고를 보고 지원하지만 공부 실력이 부족하여 떨어집니다. 행운의 여신이 전두환을 도와주게 됩니다. 갑자기 결원이 생겨 육사에 합격하게 됩니다.
전두환의 육군사관학교
그렇게 1952년 전두환은 대한민국 육군사관학교 11기로 입교를 합니다.
11기는 6.25 전쟁이 한창이던 1952년 진해에 문을 연 4년제 육군사관학교의 첫 입학생으로 정규 육사생이라는 명예와 자부심 그리고 매우 강력한 동료 집단의식을 키우게 됩니다.
자신들을 11기가 아닌 정규 1기로 불러달라는 기칭파동을 일으키는가 하면 일부는 사조직인 하나회를 결성하며 정치군인의 대명사로 자리 잡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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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년 뒤 육사 11기는 156명이 졸업하는데 전두환의 졸업성적은 126등으로 하위권으로 졸업합니다. 첫 임지는 21사단 소대장이었으며 육사 태능부대를 거쳐 이후 25사단 72 연대 중대장을 맡게 됩니다.
1960년 전두환이 육군 ROTC교관으로 서울대에서 근무하고 있었을 때 박정희가 5.16 군사 쿠데타가 발생합니다.
어떻게 해서라도 쿠데타 세력에 참여하고 싶었던 전두환은 육사 생도들을 설득하여 혁명지지 시가행진을 합니다. 그로 인해 혁명이 성공하는데 큰 역할을 하게 되면서 박정희의 마음을 사로잡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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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2 쿠데타 성공 원인
시간이 흘러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는 김재규의 총탄에 의해 사망하게 되고 이는 전두환이 12.12 쿠데타로 이어지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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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이 보안사령관으로 임명될 때 노태우는 전방 육군 9 사단장에 발령받게 되고 쿠데타 당시 전방의 병력을 쿠데타에 동원하는 무모함으로 인해 정부군을 제압하는데 큰 역할을 하게 됩니다. 이 결정적인 역할로 인해 전두환 정권의 이인자이자 후계자가 됩니다.
전두환과 맞선 장태완 장군 이야기가 궁금하신 분은 아래 버튼 클릭👇🏻
이후 신군부는 정국을 보다 유리하게 이끌기 위해 북한의 남침 가능성을 지속적으로 언급하고 활용합니다. 정말로 북한의 남침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했다면 전방 사단을 쿠데타로 활용했을지 의문입니다.
윤성민 육군참모총장이 서울로 진군하여 전두환 등 쿠데타 세력을 토벌하려고 하다가 전두환과 윤성민은 협정을 맺게 됩니다. 협정의 내용은 양측 군대 모두 서울로 출병시키지 않는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전두환에 의해 17계급 강등당한 정승화참모총장의 이야기 궁금하신 분은 버튼 클릭👇🏻
하지만 전두환은 몰래 서울로 군대를 출병시키고 쿠데타는 성공합니다.
서울의 봄
박정희가 사망하고 유신시대는 종결되었습니다. 야당과 재야세력 그리고 학생들은 민주화가 올 것으로 기대한 시기가 있었습니다. 이 시기를 바로 서울의 봄이라고 부릅니다.
상관을 끝까지 지킨 김오랑 소령 이야기가 궁금하신 분은 아래 버튼 클릭 👇🏻
전두환은 "나는 정치에 관심이 없다. 군대로 돌아갈 것이다."라고 말해왔습니다. 하지만 1980년 4월 14일 전두환은 중앙정보부장에 임명되면서 보안사령관과 중앙정보부를 거머쥔 그야말로 무소불위의 권력을 손에 넣게 됩니다.
학생들은 이를 매우 심각하게 받아들였고 "계엄철폐""전두환 퇴진"을 외치면서 시위는 격화되었고 5월 15일은 무러 10만 명이 넘는 학생들이 서울역에 집결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강력한 저항에 신군부가 꺼내든 카드는 안보로 국민의 민주화 열기를 '북한의 남침설'과 연계된 일로 몰아가기 시작합니다.
5.18 광주민주화운동
1980년 5월 17일 전두환은 비상계엄을 전국에 선포합니다. 김영삼, 김대중, 김종필 정계를 대표하는 3김을 체포 혹은 가택 연금 하고 그 외 세력들 또한 모두 체포하고 국회를 폐쇄합니다.
5월 18일 민주주의를 역행하는 신군부에 분노한 광주학생들은 전남대 정문에 모여 거세게 항의합니다.
계엄군은 상부의 지시에 따라 강력대응으로 맞서면서 사상자는 속출하게 됩니다. 이러한 만행을 지켜본 일반 시민들까지 거리에 나서면서 광주 전체로 시위는 확산되었습니다.
5월 19일에는 최소 3000명 이상 시위가 절정이었던 20일에는 20만 명 이상이 참여하게 되면서 5.18 광주민주화운동이라는 역사의 획을 그은 민주화운동이 일어납니다.
전두환은 국민들의 비상계엄 해제와 민주화 요구에 대해 북학의 위협을 이야기하며 군부의 정치적인 개입을 정당하 하였고 전시 혹은 그에 준하는 상황에만 발동할 수 있는 비상계엄의 전국 확대조치를 북한남침설을 이유로 들며 진행시켰습니다.
1980년 5월 31일 신군부가 내각을 장악하기 위한 수단으로 인법, 사법, 행정, 을 모두 장악한 초헌법적 기구인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를 발족합니다.
국보위는 비리 척결을 명분으로 공직자, 국영기업, 공기업, 금융기관, 교육계등 1만 명이 넘는 사람들을 해직시켰습니다.
대통령 당선
1980년 8월 27일 장충체육관에서 열린 통일주체국민회의 간접선거에 무소속으로 출마 99.9%라는 지지율로 대한민국 11대 대통령에 당선됩니다.
1981년 1월 15일에는 민주정의당(민정당)을 창당하고 본인이 총재가 되었습니다. 이후 민주화 운동에 대한 탄압은 지속되었고 '삼청교육대'를 만들어 인권을 유린하였습니다.
쿠데타로 집권한 전두환은 미국의 승인이 절실했습니다. 레이건 대통령의 초청서안에 전두환은 워싱턴으로 날아갔지만 미국 정부의 대접은 싸늘했다고 합니다.
전두환은 정치자금을 적게 내고 대통령과의 만찬 회동에 늦게 도착하고 비협조적인 모습을 보였던 당시 재계 7위였던 국제 그룹을 하루아침에 공중분해 해버립니다.
전두환 심판
1995년 김영삼 문민정부 시절 한국 근현대사의 어둡고 비극적인 과거를 청산하겠다며 5.18 광주민주화운동에 관한 특별법을 만들어 전두환과 노태우를 소환합니다.
그리고 12.12 쿠데타, 5.18 광주민주화운동에 대한 1심선고공판에서 전두환에게는 사형이 선고되고 그 뒤 2심에서는 무기징역과 추징금 이천이백억 원으로 감형 확정 판결을 받습니다.
하지만 1997년 12월 22일 국민 대화합이라는 명분으로 특별사면받아 2년여 만에 석방됩니다. 과연 피해자들은 동의한 것일까요?
석방된 이후 사죄하는 모습을 끝내 보여주지 않고 2021년 11월 23일 향년 90세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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