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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이야기/역사적 인물

김재규 이야기 서울의 봄 김동규

by 인물책 2023. 12. 26.

 

영화 서울의 봄 인기에 힘입어 영화 속 실제 인물에 관심이 높아지고 있습니다.

인물에 대해 포스팅을 하는 저로서는 반가운 일입니다.

박정희 암살을 세 번이나 계획했던 인물 김재규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서울의 봄 김동규
김재규를 모티브로한 서울의 봄 김동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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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미소집 아들 김재규

김재규 생가
김재규의 생가

1926년 경북 선산에서 출생한 김재규는 정미소를 하는 집안에서 태어나 부유한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선주 보통 학교에 진학했지만 성적이 좋지 않아 상급학교로는 진학하지 못했습니다. 지역 유지였던 아버지는 이에 실망하여 김재규를 일본으로 유학 보냅니다.

 

그러나 유학생활 중 일본 학생과 싸우는 바람에 2년 만에 학업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돌아온 김재규는 아버지가 힘을 써준 덕에 1941년 당시 5년제였던 안동 농민학교에 진학하였습니다.

 

안동농민학교 4학년 시절 일본군 특별 간부후보생으로 선발되어 가미가제 특공대에서 훈련을 받으며 생활하다 1945년 8월 15일 해방을 맞이하게 됩니다. 

대한민국 정부수립 경축식
대한민국 정부수립 경축식 모습

해방이 되고 다시 집으로 돌아온 김재규는 중등교원 양성소를 거쳐 김천중. 고교에서 교사생활을 하게 되는데 적성에 맞지 않아 곧 그만두게 됩니다. 

 

조선경비 사관학교

1946년 김재규는 육군사관학교의 전신인 조선경비 사관학교 제2기생으로 입교 합니다. 김재규는 그곳에서 고향도 같고 비슷한 점이 많은 동기생과 가깝게 지내게 되는데 그는 김재규보다 9살 많은 박정희였습니다.

조선경비 사관학교조선경비사관학교 시절 박정희
조선경비사관학교/박정희 

해방 이후 많은 수의 만군, 일본군 출신들이 해방된 조국에서 자신들의 부끄러운 과거를 세탁하려고 조선경비사관학교에 들어갔습니다.

 

김재규와 박정희도 다르진 않았을 것입니다. 다만 김재규는 일제에 저항하는 모습을 보여주었고 박정희는 혈서까지 써가면서 일본군에 들어갔다는 사실입니다.

 

김재규는 군사훈련 및 군사 과목들이 일반학교들보다 더 재미있고 체질에 맞았던 것 같습니다. 김재규는 군대의 생명인 충성, 절도, 질서, 복장단정 등이 자신의 생활신조와 맞아 군대 생활이 편했다고 합니다. 

 

조선경비사관학교에서 김재규는 14등으로 졸업하였고 박정희는 3등으로 졸업하였습니다. 

 

1946년부터 군생활을 하지만 초임 장교시절 군경 체육대회에서 미군과 충돌을 일으켜 면직당하고 고향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대륜 중학교박선호
대륜중학교 와 제자로 만난 박선호

대륜중학교에서 체육교사로 근무하다 10.26을 함께한 박선호를 제자로 만나게 됩니다.

이후 다시 군으로 복직해 6.25에도 참전했으며 안동지구 공비토벌 작전에서 공을 세워 충무무공훈장을 받기도 했습니다.

왼)6.25   / 오)충무무공훈장 
김계원
김계원 비서실장

 

1960년 김재규가 육군대학 부총장으로 잠시 근무하던 시절 당시 총장이자 박정희의 마지막 비서실장이었던  김계원과 인연이 됩니다.

 

제 3 공화국 출범

5.16 쿠데타

1961년 6월 16일 박정희는 김종필 등의 세력과 5.16을 일으켜 정권을 장악하고 제3 공화국을 출범시킵니다.

 

김재규는 박정희 정권에서 군인 신분을 유지한 체 호남비료 사장을 지내고 6사단장을 거쳐 6관구 사령관으로 근무합니다.

호남비료공장 준공식김신조 사건
왼/호남비료 공장 준공식에서 박정희와 김재규  오/김신조 사건

 

1968년 김신조 사건 이후에는 보안사령부의 전신인 방첩부대장으로 발령받아 일하게 됩니다.

박정희에 의해 육군 소장으로 진급했고 1969년에는 중장으로 진급하였습니다.

 

제 5대 대통령 취임식제 6대 대통령 취임식제 7대 대통령 취임식
순서대로 제5대 제6대 제7대 대통령 취임식

 

김재규가 군의 요직을 거치는 동안 박정희는 제5대 제6대 대통령에 이어 1969년 3선을 개헌하고 1971년 제7대 대통령에 당선되었습니다.

 

헌법 공포식제 8대 대통령 취임식
헌법 공포식과 제8대 대통령 취임식

 

1972년 10월  대통령 임기를 6년으로 연장하고 연임 제한을 없애는 내용의 유신헌법을 공포한 뒤 같은 해 12월 제8대 대통령에 당선되었습니다.

 

김재규의 말에 의하면 이때부터 박정희 정권에 회의를 느껴 거사를 계획했다고 합니다.  1972년 3 군단장으로 근무하던 시절 유신헌법을 읽고 난 후 이것은 민주헌법이 아니라 대통령이 영구집권하려는 헌법이다.라고 생각하였다고 합니다.

 

박정희 하야를 계획하다 

그래서 김재규는 박정희에게 하야를 권고할 계획을 세우게 됩니다.

 

김재규의 법정 진술 내용을 그대로 옮겼습니다.

대통령 각하께서 전방을 연말에 쭉 군단까지 순시를 하셨습니다.

그때 3군단에 순시를 하러 오실 적에 3군단에서 각하를 연금해 놓고 그 자리에서 녹음테이프를 갖다 대고 각하로 하여금 하야 권고를 드리려 했습니다.

 

박정희가 3군단에 순시를 왔을 때 안에서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부대 울타리도 특이하게 설치하였으나 상황이 여의치 않아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고 합니다.

 

1973년 김재규는 25년간의 군 생활을 예편했고 고향에서 평범하게  살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박정희의 제안으로 국회에 입성하게 됩니다. 같은해 12월 중앙정보부 차장으로 임명되었습니다.

유신헌법 반대 시위긴급조치 9호
유신헌법 반대시위하는 학생들과 긴급 조치 9호 

 

당시 한국의 상황은 박정희로 인해 성장과 경제발전을 이루기도 했지만 유신헌법에 대한 불만으로 학생들의 시위가 이어지며 긴급조치등이 실시되는 아슬아슬한 상황이었습니다.

 

3 번의 암살 계획

1974년 김재규는 건설부 장관에 임명되었습니다.

 

김재규의 법정 진술 내용을 그대로 옮겼습니다.

건설부 장관으로 발령되는 날 1974년 9월 14일입니다. 그날 저는 몸에 권총을 휴대하고 사령장을 받으러 갔습니다. 똑바로 서있는 걸 보십시오 여기를 보십시오 오른쪽 하복부 쪽을 유심히 관찰하면 나옵니다.

 

첫 번째 암살 계획 사령장 받으로 갔을 때 

박정희에게 사령장을 받는 김재규

 

두 번째 암살 계획 건설부 시찰할 때 

박정희 건설부 초도 시찰 모습박정희 건설부 초도 시찰 모습박정희 건설부 초도 시찰 모습
박정희가 건설부 초도시찰 모습

 

세 번째 육해공군  참모 총장 모임

궁정동 안가
궁정동 안가

이후 박정희에 눈과 귀를 가려버린 차지철과  yh무역 여공농성 사건, 신민당 총재 김영삼 의원직 제명사건부마항쟁 등의 일들로 마찰을 빚어 오다 1979년 10월 26일을 맞이하게 됩니다.

차지철과 김재규
차지철과 김재규

 

김재규의 10월 26일

삽교천 준공식에 참석한 박정희삽교천 준공식 박정희
삽교천 준공식

1979년 10월 26일 오전 김재규는 삽교천 행사에 박정희와 함께 하려 했지만 자리 나 지키라는 차지철로 인해 참석하지 못하고 당일 오후 연회에 참석하라는 차지철의 전화를 받게 됩니다.

정승화김계원
왼)정승화 오)김계원

 

이후 김재규는 정승화와 약속을 잡은 뒤 궁정동으로 향했습니다. 궁정동에 도착한 김재규는 김계원과 박정희를 기다리며 월권이 심한 차지철을 오늘 해치운다는 말을 했습니다.

 

 

 

이에 김계원은 너무 격하게만 받아들이지 말고 다 생각이 있으니 지켜보라며 김재규를 진정시켰다고 합니다. 그 무렵 도착한 박정희와 함께 연회장으로 이동했고 만찬을 시작합니다.

왼)박선주 오)박흥주 

이후 신재순과 심수봉이 참여한 연회의 분위기는 무르익어갔습니다. 하지만 불안한 기색을 보이며 연회장을 들락날락하던 김재규는 박흥주 박선주에게 자신의 계획을 말하고 연회장으로 다시 들어갔습니다.

 

김계원을 향해 각하를 똑바로 모시라고 말을 한 뒤 차지철의 오른팔을 쏘고 이어 총구는 박정희를 향하게 됩니다. 그렇게 그날의 연회는 역사에 남을 사건으로 남게 됩니다.

10.26 사건재현 하는 김재규
10.26 사건

 

이후 김재규는 한차례 더 총을 쏘고 박선호에게 현장 마무리를 지시하고 궁정동 안 가 별관에 있던 정승화, 박흥주 등과 육군본부로 향합니다. 훗날 이 일로 정승화는 모진 고초와 17계급 강등이라는 수모를 당하게 됩니다. 정승화의 인생이 궁금하신 분은 아래 버튼을 눌러주세요 

 

 

최규하 노재현
왼)최규하  오)노재현

같은 시간 동석했던 김계원은 박정희를 병운으로 옮겼지만 박정희는 숨을 거두고 말았습니다.

 

청와대로 돌아간 김계원은 국무총리 최규하 국방장관 노재현 육군참모총장 정승화에게 사실을 알렸다고 합니다. 

 

내막을 알게 된 정승화는 육군본부에서 계엄령선포를 주장하던 김재규를 체포하게 됩니다.

 

 

10.26 사건 발표 

전두환전두환
10.26 사건 발표중인 전두환

 

10.26 사건의 합동수사본부장으로 임명된 전두환은 10.26 사건에 대해 발표를 하게 됩니다.

 

실제 전두환의 발표 내용을 그대로 옮겼습니다.

지난 10월 26일 중앙정보부 식당에서 빚어진 역사적인 비극의 발단은 김재규가 은연중 계획하에 자행된 범행이었음이 수사결과 드러났다. 김재규는 평소 대통령께 건의하는 정책에 대해서 불신을 받아왔고 자신의 모든 보고나 건의가 차지철 경호실장에 의해서 제동을 당하였을 뿐 아니라 평소에 개인적인 감정으로 양인의 감정대립이 격화되어 있었고 업무집행상의 무능으로 수차례에 걸쳐 대통령으로부터 질책을 받았으며 이로 인하여 최근 요직 개편설에 따라 자신의 인책 해임을 우려한 나머지 범행을 저지른 것으로 밝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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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규가 범행을 저지른 이유에 대해서 차지철과의 갈등 미국 배후설등 여러 말들이 있었지만 김재규는 법정에서 박정희 시해 이유와 10.26 사건에 대해 이렇게 진술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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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규의 혁명 이유

10.26 사건 공판 

실제 김재규가 한 말을 그대로 옮겼습니다.

10월 26일 혁명의 목적을 말씀드리면은 다섯 가지입니다.

첫째 자유민주주의를 회복하는 것이요

둘째 이나라 국민들의 보다 많은 희생을 막는 것입니다.

세 번째 우리나라를 적화로부터 방지하는 것입니다.

네 번째  혈맹의 우방인 미국과의 관계가 건국 이래 가장 나쁜 상태입니다.

이관계를 완전히 회복해서 혈맹의 우방으로서의 관계를 회복해서 돈독한 서로 관계를 가지고, 국방을 위시해서 외교, 경제까지 보다 적극적인 협력을 통해 국익을 도모하자는데 있었던 것입니다.

마지막 다섯 번째로 국제적으로 우리가 독재국가로서 나쁜 이미지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을 씻고 이나라 국민과 국가가 국제사회에서도 명예를 회복하자는 것입니다.

이 다섯 가지가 저의 혁명의 목적이었습니다.

항소심 공판에서의 김재규

 

김재규의 마지막

김재규는 1980년 5월 24일 서대문 형무소에서 민주주의를 마음껏 만끽하라는 말을 남기며 교수형을 당하게 됩니다.

형집행 전 김재규 마지막 모습 
사형장으로 가는 김재규

그에 대한 평가는 현재까지도 엇갈리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