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인물 이야기/역사적 인물

정승화 참모총장 이야기 서울의 봄

by 인물책 2023. 12. 18.

서울의 봄 인기로 젊은 사람이나 그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도 12.12 사태와 관련 인물에 관심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역사를 제대로 알아야 미래가 보인다는 말이 있습니다.
육군참모총장 정승화 한국 현대사의 희생양이 된 그의 인생을 따라가 봅니다. 
 

군인 정승화 

정승화 육군참모총장

 

출생 : 1929년 2월 27일 경상북도 김천 
사망 :  2002년 6월 12일 73세 
 
18세 1947년 조선국방경비사관학교에 5기생으로 입학하여 이듬해 4월 졸업하였고 
8월 15일 대한민국 국군이 출범하면서 육군 소위가 되었고, 고속승진 후 대위가 되었습니다. 
 
21세 1950년 6.25 전쟁이 일어나자 3사단 백골부대 예하 대대장으로 낙동강 전투와 기계, 안강 전투, 형산강 도하 작전에 지휘관으로 출전하였습니다. 
 

현리 전투
현리 전투

 

22세 1951년 강원도 인제군에서 벌어진 현리 전투에 참가하였습니다. 현리전투는 칠천량해전(임진왜란), 쌍령전투(병자호란)와 더불어 한국 역사 3대 패전 중 하나로 꼽힙니다. 
 

유재흥
군단을 버린 유재흥

 

당사 전투를 벌인 3군단이 중공군에 의해 포위당하자 당시 3 군단장이었던 유재흥은 부군단장을 대리로 지정한 후 군단을 버리고 항공기 편으로 군단본부로 돌아가 버립니다.
 

서울의 봄 이태신의 실제 인물 장태완 장군 이야기가 궁금하신 분은 아래 버튼을 눌러주세요 👇🏻

 
 

이로 인해 지휘권이 모두 와해되어 중공군에게 참패를 당하게 됩니다. 정승화는 이때 중공군에게 포로로 잡혔다가 화전민의 도움으로 탈출을 하게 됩니다.
 

서울의 봄 포스터와 정승화
영화 서울의 봄 포스터

 
이후 3군단은 미군에 의해 해체되어 버립니다. 이어 육군 제3보병사단 작전참모로 재직 중 1953년 휴전을 맞이하게 됩니다.
 
이후 사단 작전참모, 미육군보병학교 고등군사반, 육군대학 교관 등을 거쳐 27세인 1956년에 대령으로 진급하여 연대장을 지냅니다. 
 
1961년 5.16 군사 정변 당시 12사단 부사단장으로 있으면서 사단장과 함께 쿠데타를 지시하였습니다. 
 

 
 

정승화는 육군 2군단 작전과 과장으로 재직 중 국가재건최고회의 최고위원의 한 사람에 겸임되었고 그해 11월 육군 준장으로 승진하였습니다.
 
33세 1962년 7월 방첩부대장 (현 기무사령관)으로 임명되었습니다.


 

정승화 사진
승승장구한 정승화

 

34세  1963년 방첩부대장 재직 시 육사 11기 전두환, 노태우 등이 일으킨 쿠데타음모(7.6 친위 쿠데타 미수사건)를 육사 5기 동기생인 김재춘과 함께 부하들의 철없는 사건이라며 덮고 넘어갔습니다.


전두환 이야기가 궁금하신 분들은 아래 버튼을 눌러주세요  👇🏻

 


35세인 1964년 육군 보병 제7사단 참모장 등을 지내고 국방부 인사국 부국장, 1군단 참모장, 육군 제7사단 부사단장 등을 역임하였다. 
 
36세인 1965년 육군 제1군단 부군단장, 육군본부 특전감, 육군 제3군단 참모장, 육군 제3군단 부군단장 등을 역임하였습니다. 

 
 

 
 

이후 계속 승승장구 

정승화
정승화 육군참모총장

 

44세 1973년 중장으로 진급, 제3군단장,
46세 1975년 육군사관학교 교장
48세 제1야전군사령관
49세 대장으로 승진 
50세 1979년 2월 육군참모총장에 임명되었습니다. 

 

 10.26 그날의 정승화 

10.26 사건 김재규10.26 사건
10.26 사건을 재현하는 김재규

 

1979년 10월 26일 정승화 인생에 전환점이 되는 큰 사건이 일어나게 됩니다. 김재규가 박정희 대통령을 암살한 10.26 사건입니다.
 

김재규 이야기가 궁금하신 분은 아래 버튼을 눌러주세요 

 
당시 중앙정보부장 김재규는 궁정동 안 가 '나'동에서 만찬 중 대통령 박정희를 권총으로 암살합니다. 
 
이날 정승화는 김재규로부터 초대를 받고 궁정동 안 가 '가'동에서 중앙정보부 차장보 김정섭과 함께 식사를 하고 있었습니다. 
 
박정희가 시해된 후 정승화는 김재규와 함께 김재규의 자가용을 타고 육군본부로 가게 됩니다. 
 
사건 현장에 있었다는 사실이 육군보안사령부 사령관 전두환이 훗날 12.12 사태를 일으키고 정승화를 체포하는 명목이 됩니다.
 

 

박정희 대통령이 시해되자 10월 27일 새벽 4시 제주도를 제외한 전국에 비상계엄이 선포되었고, 정승화는 계엄사령관에 임명되어 막강한 권력을 쥐게 됩니다. 

 

12.12 사태 이후 정승화 

 

그러나 정승화는 처음에 범인이 차지철 경호실장인 줄 알고 김재규를 쉽게 체포하지 못하고 머뭇거렸으나 시해 현장에 있던 비서실장 김계원의 증언으로 김재규 체포 작전을 지시하였습니다. 
 
그러나 정승화의 이런 막강한 권한은 1개월 보름 만에 막을 내리게 됩니다. 

 

 
 

10월 26일 사건을 조사하던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계엄사령관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을 대통령 시해 현장에 있었다는 이유로 당시 최규하 대통령의 재가 없이 내란음모죄 혐의를 씌워 강제 연행되어 최규하의 재가가 있기까지 감금되어 있었습니다. 
 

전두환 육군보안사령관최규하 담배피는 모습
저두환 육군보안사령관과 최규하 

 
전두환과 신군부는 정승화를 연행한 뒤 사후재가를 받으려고 최규하에게 압력을 가하였지만 최규하는 국방부장관을 데려오라고 거절했습니다.


전두환 이야기가 궁금하신 분들은 아래 버튼을 눌러주세요  👇🏻


결국 늦게 나타난 국방장관 노재현이 최규하에게 재가토록 설득하였습니다. 그렇게 최규하는 재가를 하게 됩니다.
 
훗날 노태우는 참모총장이라는 자가 박정희의 죽음을 현장에서 막지 못하였다고 주장하며 그의 체포를 정당화하였습니다. 
 
정승화는 이때 전두환의 부하 허삼수 등에게 연행되어 육군참모총장직이 박탈되고 보안사령부 서빙고 분실에서 당시 육군 수도경비사령관 장태완 소장과 함께 모진 고문을 받게 됩니다. 

 

하나회 이야기가 궁금하신 분은 아래 버튼 클릭 👇🏻


 

정승화가 장태완을 임명하는 사진
정승화가 장태완을 임명하는 모습

 

 
 

 
 

정승화의 후임으로 12.12 군사 반란을 묵인한 이희성이 계엄사령관 겸 육군참모총장에 임명되었습니다. 
 
정승화는 이후 극방부 군사재판에 회부되어 첫 공판에서 내란방조미수죄로 징역 10년형을 선고받았습니다. 
 

재판 받는 정승화
재판 받고 있는 정승화

 

정승화는 군사재판의 판결에 의해 대장에서 이등병으로 자그마치 17계급이나 강등당하는 굴욕적인 처분을 받으며 강제 예편을 하게 됩니다. 
 
그간 받은 장교 급여분도 이병으로 동일 기간을 복무할 시 받을 돈을 제외하고 전부 몰수당하고 군인연금 수혜 권리도 박탈되어 경제적인 위기도 겪게 됩니다.

 

 
 

한평생 뼛속까지 군인으로 살아온 정승화에겐 최악의 처분이자 수치였습니다. 
 
군교도소 독방에서 일반 사병죄수와 똑같이 지내며 몸무게가 9kg이나 줄었다고 합니다. 

정승화
재판 중인 정승화

 

정승화는 곧이어 징역 7년형으로 감형되어 군 교도소에서 복역하다 이듬해인 1980년 6월 10일 형집행정지로 석방되어 집행유예형이 내려집니다.
 
1981년 3월 전두환 대통령 취임기념 특사로 사면, 복권되게 됩니다.
 

 


전두환 이야기가 궁금하신 분들은 아래 버튼을 눌러주세요  👇🏻

 

정치인 정승화 

김영삼과 정승화
대권유세에 함께하는 정승화

 

이후 정승화는 별다른 행적 없이 조용히 지내게 됩니다.  1987년 김영삼은 정승화에게 도움을 요청하게 됩니다.
 
정승화는 정치군인에게 뒤통수를 맞은 사람이라며 정치라면 이가 갈린다며 거절하였습니다. 그러나 김영삼은 이번에야 말로 민간정부를 수립해야 한다고 재차 도움을 요청하게 됩니다.
 


진정한 문민정치가 이 땅에 이룩되어 명예로운 국군의 정통성을 확립하기 위해 입당하였습니다.
일부 정치군인들의 야욕을 꺾고 이 땅에 다시는 역사의 패륜아들이 이 땅에 발을 못 붙이도록 최선의 노력을 쏟겠습니다


라고 말하며  제13대 대통령 선거 직전 통일민주당에 전격 입당하여 상임고문 겸 부총재로 김영삼 후보를 지지하였습니다.
 
입당 과정에서 김영삼은 전국구 국회의원 1번을 제안했지만 정승화는 거절하였습니다. 
 

 

 
 
 

제13대 대통령 포스터
제13대 대통령 포스터

 

정승화의 영입으로 지지율이 오르긴 했으나 김대중 김영삼의 단일화 실패와 칼기사건을 비롯한 여러 요인으로 노태우가 대통령으로 당선되자 이듬해 정계은퇴를 하면서 사실상 정치에서 완전히 손을 떼게 됩니다.
 
59세인 1988년 군적이 회복되어 예비역 육군대장의 자격을 되찾고 몰수된 돈과 군인연금 수급권도 돌려받게 됩니다. 

 

정승화 마지막 길 

64세인 1994년 장태완(수도경비사령관), 김진기(육군 헌병감), 하소곤(육군 작전참모부장)등 12.12 사태 당시 육본 진압군 측 장군들과 함께 전두환, 노태우 등 당시 신군부 출신 인사들을 검찰에 군사반란 혐의로 고발했으나 당시 검찰은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는 이유로 고발된 인사들을 기소유예 처리합니다. 
 
67세인 1996년 8월  12.12군사반란죄, 5.18 광주민주화운동 유혈 진압 등 13개의 혐의로 기소된 전두환은 1심 재판에서 법정 최고형인 사형과 추징금 2205억 그리고 노태우는 징역 15년과 벌금 2626억을  선고받습니다    

 

증인으로 참석한 정승화
증인으로 참석한 정승화

 

이때 정승화는 증인으로 참석하여 한이 풀리는 듯했습니다. 
그러나 이듬해 12월 22일 김대중이 대통령으로 당선된 지 4일 만에 전두환, 노태우가 특별사면으로 풀려나자 

 

반성도 하지 않는 사람들을 풀어 주다니 이 나라가 진정으로 법치주의 국가입니까?

 
 

라며 강한 분노를 표시하였습니다.
68세인 1979년 대법원이 12.12사태를 군사반란으로 규정한 뒤 "김재규 내란기도 방조미수혐의"에 대하여 정승화에게 무죄를 선고하였습니다. 
 
70세인 1999년 육해공군 및 해병대 장성 출신 모임인 성우회 제6대 회장에 당선되어 국가보안법 폐지 반대운동을 전개하고 쿠데타 피해자 출신 예비역들의 권익을 위해 부단히 노력하였습니다.
 
당뇨와 고혈압 등 각종 질환으로 고생하였고, 만년에는 파킨슨병을 앓기도 하였습니다. 

 
 

 
 

73세인 2002년 병세가 악화되어 서울 신촌세브란스 병원에 입원했다가 그해 6월 12일 사망하였습니다. 
 
정승화의 묘는 국립대전현충원에 예비역 대장 자격으로 안장되어 있습니다. 

 

정승화의 묘정승화 저서
정승화의 묘와 저서 

 
정승화는 슬하에 3남 1녀를 두었는데 셋째인 정이열은 아버지처럼 육군사관학교(육사 38기)를 나와서 장교로 복무하다가 대령으로 예편 및 전역하였습니다. 저서로는 대한민국 군인 정승화 (2002)가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