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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이야기/역사적 인물

장태완 장군 인생 이야기

by 인물책 2023. 12. 15.

 

영화 '서울의 봄' 인기가 뜨거운 가운데 관객수가 700만을 돌파하였습니다.

 

12. 12 군사반란을 담은 영화 서울의 봄 이태신 역의 실존인물 장태완 장군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인생을 살다 간 장태완 장군 이야기입니다.

 

 

장태완 장군
이태신 실제인물 장태완장군

 

장태완 장군의 출생과 사망

1931년 9월 13일 일제강점기 경상북도 칠곡군에서 집안의 둘째로 태어났습니다. 

1950년 대구 상고 졸업

1950년 육군종합학교 1기 

1951년 육군보병학교 졸업

1952년 육군공병학교 졸업 

1958년 조선대학교 법학과 학사 

2001년 조선대학교 명예 정치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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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7월 26일 (향년 78세) 사망 

 

 

 

 

장태완 장군의 성격

격려하는 장태완 장군중령 장태환
젊은 시절 장태완 장군

 

 

 

 

ㅁㅂ장태완 장군은 6.25 전쟁이 발발하자 장교로 참전했으며 중령 시절에는 맹호부대 일진으로 파월되었습니다. 평소 부하들의 체력단련에 매우 신경을 썼으며 힘든 훈련을 많이 시켰던 것으로 유명합니다. 

 

힘든 훈련을 많이 시켰던 것만큼 우수한 병사에게는 후한  포상을 주기도 했습니다. 부하들과 칼바람 부는 겨울에도 웃통을 벗고 구보를 했지만 그 누구도 불평을 하지 못했습니다. 

 

그 이유는 장태완 장군 본인도 병사들과 함께 웃통을 벗고 뛰었기 때문입니다. 뼛속까지 군인이라는 말이 여기서 나온 듯합니다.

 

 

 

당시 육군 소장임에도 불구하고 병장의 풀어진 전투화 끈을 묶어주며 격려하였다는 일화가 있습니다. 그 당시 일명 짬밥은 질 낮은 쌀로 밥과 고기는 볼 수 없는 부실한 반찬이 일반적이었습니다.

옛날 군대밥
그당시 군대 식판

 

그런데 장태완 장군 부임 후 병사들의 식사가 몰라보게 개선되어 병사들이 아주 만족했다고 합니다. 장태완 장군은 그 후로도 종종 병사식당에서 밥을 먹었기에 개선된 식사는 쭉 유지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영화에서 장태완 역의 이태신은 지조 있고 흔들림 없는 선비 같은 성격을 띠고 있습니다. 실제 장태완 장군의 성격은 어떠했을까요? 힘들고 어려운 처지에 있는 병사에게는 한 없이 자상한 사람이었지만 불같은 괄괄한 성격의 소유자였다고 합니다. 

 

서울의 봄 이태신장태완 장군의 역을 맡은 김기현 배우
같은 역을 연기한 정우성 배우와 김기현 배우

 

 

(제5 공화국)에서 장태완 장군역을 맡은 배우 김기현이

 

"야, 이 반란군 놈의 새끼야! 니들 거기 꼼짝 말고 있어! 내 지금 전차를 몰고 가서 네놈들의 머리통을 다 날려버리겠어!"라고 소리쳤던 것처럼, 기자 앞에서도 장태완 장군을 설득하려는 황영시 중장 (1 군단장)을 향해 "이 반란군 새끼야"라고 호통쳤던 이야기를 털어놨다고 합니다.

 

서울의 봄에서 정우성이 연기했던 이태신의 모습보다 제5공화국의 배우 김기현 님의 연기가 실제 장태완 장군의 성격에 가깝다고 할 수 있습니다. 

 

 

 

장태완 장군 하나회 영창 보내다

하나회 사진
하나회 단체 사진

 

수도경비사령부 참모장이 되었을 때 갑종 장교 출신인 자신을 깔보고 항명하던 육사출신 김상구를 영창에 보낸 일이 있었습니다.

 

장태완은 예고 없이 방공 진지 공사 현장에 순시를 나갔습니다. 장태완 장군이 한참 공사판을 걸어 들어가는 동안 아무도 마중 나오는 사람이 없었고 위병은 뒤늦게야 이 사실을 알다고 합니다. 

 

 

 

장태완 장군이 막사 앞에 다 와서야 대대장이었던 김상구 중령이 나와 경례를 했다고 합니다. 참고로 김상구는 육사출신으로 하나회의 핵심이었습니다. 그리고 하나회의 보스였던 전두환과는 동서 사이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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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구
동서 사이인 김상구와 전두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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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구를 대동하고 공사현장을 간 장태완 장군은 엉망인 공사현장을 보곤 더욱 분노하게 됩니다.

 

"이렇게 모자란 놈이 어떻게 대한민국 장교가 됐나?"

그러자 김상구 중령은 고개를 뻣뻣이 들고 대들며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저도 4년제 육사에서 배울 만큼 배우고  임관한 장교입니다 장교의 명예를 짓밟는 그 말씀을 취소해 주십시오."

장태완은 자신에게 이렇게 대드는 것이 하나회라는 배경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어 더 괘씸했다고 합니다.

 

"제대로 일도 못하는 놈이 누굴 믿고 건방지게 굴어"

그러나 김상구도 물러나지 않았습니다.

일개 영관이 장군에게 도저히 할 수 없는 말을 하게 됩니다.

 

"내가 당신보다는 군사학을 더 공부하고 임관했소."

그렇게 사령부로 돌아온 장태완은 이를 참지 못했고 결국 김상구는 영창에 들어갔다 전역하게 됩니다 

 

이 사건으로 인해 하나회 장교들은 장태완에게 깊은 유감을 품게 되었습니다.

김상구의 손윗동서인 전두환 또한 그에게 악감정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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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2 사태

12.12 사태 당시 서울모습
계엄당시 서울모습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이 김재규에게 암살당하는 사건이 일어납니다. 

 

이에 국가는 계엄 체제로 들어가게 되었죠 이 사건 이후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은 계엄사령관으로 전두환 보안 사령관은 합동수사본부장을 맡아 10.26 사건을 조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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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장태완 장군은 수도경비사령관에 임명되었습니다. 수도경비사령관은 서울을 지키는 막중한 임무를 가지고 있었으며 헌병, 특공 그리고 방공 병력을 동원할 수 있는 지휘관이었습니다. 

 

1979년 12월 12일 전두환은 정승화와 마찰이 발생하자 조사라는 명분으로 그를 납치하는 이른바 12.12 군사반란이 시작됩니다. 신군부 세력이 정승화 사령관을 강제로 연행하여 권력의 주도권을 가져오려 했습니다.

 

 

정승화 육군참모총장강제 연행된 정승화 사령관
정승화 계엄사령관

 

이때 전두환은 평소 강직한 군인으로 쿠데타 협조에 가능성이 낮다고 생각한 장군들을 불러 연회를 열었습니다.

 

이는 이들이 제대로 싸워보지 못하게 하려는 전두환의 야비한 계책이었습니다. 그 연회에는 장태완 사령관 그와 함께 전두환과 끝까지 싸운 정병주 장군과 김진기 헌병감이 있었습니다.

 

그렇게 연회를 즐기던 중 정승화 사령관이 연행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수도경비사령부에 달려갑니다. 그러나 장태완 장군 밑에 있던 핵심 병력들은 장세동에 의해 이미 반란군의 핵심이 되어있었습니다. 

 

 

 

신군부는 장태완 장군 마저 회유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장태완 장군은 이를 거부하고 반란군을 막기 위해 백방으로 뛰어다닙니다. 

 

정병주 사령관과 작전을 논의하고 전차 중대를 보내 반란군 일당을 제거하려고 했습니다. 

 

진압군의 유일한 희망이었던 9 공수에게 "보안사를 공격하라"라고 지시합니다. 당시 정병주 사령관 밑에 있던 1,3,5 공수는 하나회의 멤버로 이미 반란군의 편이었습니다.

 

이때 보안사는 매우 당황하게 됩니다. 자신의 세력이었던 1 공수와 3 공수보다 9 공수가 서울에 더 가까이 있기에 9 공수가 공격하는 경우 반란은 성공하기 어려웠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신사협정 체결" 때문에 상황은 급변합니다. 반란군에서는 9 공수여단을 출동시키지 않으면 자신들도 무력동원을 하지 않겠다고 제안합니다. 결국 육군본부 수뇌부는 이를 수락했습니다. 

김일성
김일성

 

김일성을 눈앞에 두고 아군끼리 싸우는 것은 안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는 전두환의 기만 전술이었습니다. 9 공수가 자신의 부대로 되돌아가자 전두환은 1 공수로 하여금 국방부와 육군본부를 점령하라고 지시하고 3 공수에게는 정병주 사령관을 체포하라고 명령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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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육군본부와 국방부 그리고 정병주 사령관은 체포되었고 마지막으로 남은 건 장태완 장군의 수경사뿐이었습니다. 수경사 내에서 반란군에게 회유당하지 않은 부대는 비전투 부대뿐이었습니다.

 

장태완 장군은 행정병과 취사병까지 끌어모으고 남은 전차 중대를 소집하여 이렇게 이렇게 명령합니다.

 

"전차를 선두로 수경사 내 가용가능한 모든 병력을 전투조로 구성한다 목표는 보안 사령부다 출발은 내가 선도하며, 중앙청 부근에 적절한 진지를 잡아 역모자들은 포획하고 반란을 진압한다."

 

그러나 누가 어디에서 언제 배신할지 모르는 상황이었습니다. 하나회의 도청과 너무 많은 적 그리고 반란군에게 항복한 국방부장관에 의해 결국 포기하고 장태완 장군은 체포되었습니다. 장대완 장군은 그때 상황에 대해 이렇게 회고했습니다. 

하나회원들이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을 납치했을 때 이미 대세가 기울었다.
그러나, 진압 책임을 진 내가 백기를 들 수는 없었고 죽기로 결심하니까 마음이 편안해졌다.

 

 

 

 

 

장태완 장군의 시련

장태완 장군 가족사진
장태완 장군 가족사진

 

 

장태완 장군은 서빙고에서 모진 고초를 받고 가택연금을 당합니다.장태완 장군 뿐만 아니라 가족들도 끔찍한 일을 겪게 됩니다. 

 

 모친은 아들이 올바른 일을 하다가 반란군에게 모진 고초를 겪고 있다는 사실에 분개하고 한탄하여 막걸리로 끼니를 대신하다 결국 별세하였습니다. 

 

장태완 장군은 아내와 1남 1녀를 두고 있었습니다. 장남 성호(1962년생)는 군사반란이 발생했을 때는 고등학생이었습니다. 

 

혼란한 세상과 그에 맞선 아버지의 고초 그리고 가택연금에 보안요원들이 수시로 집안을 들 쑤셔놔도 장태완 장군의 아들은 서울대 자연대에 합격해 수석을 할 정도로 똑똑하고 자랑스러운 아들이었습니다. 

 

아들은 평소 장태완 장군에게 

아버지는 군인으로서 자신의 책임완수를 위해 충정을 다한 것을 역사는 결코 외면하지 않을 것입니다

 

라며 아버지를 위로하였다고 합니다.그런 속 깊은 아들이 학교에 간다고 집을 나간 뒤로 행방불명됩니다. 한 달뒤 낙동강 기슭의 할아버지 산소 근처 인동장 씨 재실에서 사채로 발견되었습니다.

 

장태완 장군은 "아들의 시신을 싣고 서울로 올라오면서 아들의 꽁꽁 언 얼굴을 혀로 핥아 녹였다"라고녹였다" 말했습니다.

 

아버지와 아들을 잃은 후 '자신이 죽인 것 ' 이라며 눈물이 끊이지 않았다고 합니다. 아들을 묘지에 안장한 후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우리 내외의 인생은 아들이 세상을 떠났던 82년 1월 9일에 끝난 것이다." 남은 인생은 우리 일가를 망친 12.12 사건을 저주하면서 불쌍한 외동딸 하나를 위해서 모든 것을 참고 살아가기로 결심했다.

 

여기에 자신과 끝까지 싸운 정병주 사령관 또한 인근 야산에서 시체로 발견되었습니다. 

 

 

정병주 사령관
소장 정병주

 

 

정병주 사령관은 강제예편된 이후에도 12.12 사태에 대한 부당성을 주장해 오다 갑자기 행방불명되었고 야산에서 시체로 발견됩니다.

 

당국은 그가 자살한 것으로 종결지었으나 장태완은 고인은 독실한 가톨릭 신자로 정병주 사령관은 자살한 사람이 아니라고 주장했습니다.

 

정병주 사령관은 평소 장태완 장군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12.12 사태의 진상규명에 조력하겠으며 역사의 증인으로 살아남아야 하니 서로 몸 조심합시다."

 

그리고 민주화 이후 이 사건에 대한 재조사가 진행되었지만 당시 증거물이 거의 남아있지 않아 뚜렷한 결론이 나지 않았다고 합니다.

 

12.12 사태 그 후

법정에 선 노태우,전두환
12.12 사태 재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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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반란의 책임을 물어 전두환과 노태우를 잡아들이자 장태완 장군을 증인으로 채택하여 두 사람과 같은 법정에 서게 되었습니다. 이때 증언을 마친 후 두 사람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한때는 함께 국방에 열심히 다하던 입장이었는데 어쩌다 그리 되었는지 모르겠소. "

 

2000년 3월에 민주당의 인재영입에 따라 비례대표 국회위원으로 당선됩니다.

 

이후 박정희 기념사업회 이사를 맡기도 했으나 박 대통령이 하나회를 비호한 것이 반란의 원인이었다며 박정희를 비판하기도 했습니다.

 

 

 

장태완 장군의 마지막

근육을 자랑하는 장태완 장군장태완 장군 빈소
장태완 장군의 빈소 

 

장태완 장군은 2010년 7월 26일 폐암으로 별세합니다. 

 

안타깝게도 부인 이병호 씨도 장태완 장군이 숨진 2년 후인 2012년 1월 17일 우울증을 앓다 딸 장현리 씨에 "미안하다. 고마웠다, 오래오래 살아라"는 내용의 유서를 남기고 아파트에서 투신, 자살로 생을 마감하였습니다. 

 

살아생전 두 부부는 금실이 유난히 좋았습니다. 함께 문화센터를 다니며 무용도 배우고 장구도 치곤 했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