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서울의 봄의 인기가 계속되면서 정해인 씨가 연기한 실제 인물 김오랑 소령에 대한 관심도 커지고 있습니다. 특전사령관을 체포하려던 반란군에 맞서다 36살 젊은 나이에 순직한 김오랑 소령 죽음 뒤에 숨겨진 가슴 아픈 사연을 알아보겠습니다. [1990년 중령 추서]
김오랑 소령 그는 누구인가?
1944년 경상남도 김해에서 4남 1녀 중 막내로 태어났습니다. 김오랑 소령의 집은 매우 가난하여 동년배 보다 1년 늦게 중학교를 졸업하게 됩니다.
그 후 김해 유일한 고등학교였던 김해농업고등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하였고 부산대학교 공과대학에 합격을 하였으나 가난한 집안 사정으로 등록금이 없어 육사에 지원하게 되며 그렇게 김해농업고등학교 최초로 육사에 합격하게 됩니다.
학교에 위상을 세운 김오랑 소령은 집안과 지역의 경사였고 학교 입구에 현수막이 걸리고 학교 교장선생님이 직접 집으로 찾아와 기쁨을 함께 나누고 축하해 줬다고 합니다.
육군사관학교 25기 김오랑 소령은 왜소한 체구에도 운동도 잘했고 성격도 활발해서 친구도 많았다고 합니다.
육사시절 김오랑 소령을 평가한 생도훈육지도부에는 가정환경의 경제적 여유는 없으나 화목하고 다른 생도보다 인생관, 국가관 확립의 전망이 뛰어날 것으로 보인다고 적혀있었습니다.
그 후 김오랑은 1969년 소위로 임관하며 강원도 양구에 2사단 수색중대로 발령이 납니다 1970년 맹호부대 소대장으로 베트남 전쟁에 참전하게 됩니다.
1974년 제3공수특전여단 중대장을 거쳐 특전사 작전장교, 특전사 정보장교, 육군 대학교를 졸업하고 제5공수특전여단 중대장으로 근무하게 됩니다.
그리고 김오랑 소령은 역사의 소용돌이에 휘말려버린 1979년 육군특전사령관 비서실장으로 발탁되게 됩니다.
김오랑 소령의 유능함을 높게 평가하여 비서실장으로 발탁한 사람은 대한민국 특전사에 체계를 완성시킨 특전사에 전설이라 불리는 정병주 육군특수전사령관이었습니다.
비록 짧은 시간의 육근특전사령관의 비서실장이었지만 김오랑 소령을 기억하는 동기들은 예의 바르고 똑똑한 군인이었고 인맥관리보다 임무완수에 철저했던 비서실장이라고 기억하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1212 사태 김오랑 소령의 그날
1979년 김오령 소령이 정병주 비서실장으로 근무하던 그해 10월은 당시 대통령이던 박정희가 역사 속으로 사라진 10.26 역사적 사건이 일어난 시기였고 때문에 정국은 혼란스러웠고 권력지형마저 요동치던 시기였습니다.
1979년 12월 12일 마침내 전두환과 신군부는 권력장악을 위해 12.12를 일으키게 됩니다. 운명의 날인 12월 12일 오후 6시 30분경 김오랑 소령의 상관인 정병주 특전사령관은 전두환이 만든 자리에 장태완 장군, 김진기 장군과 함께 있었고 그 자리가 군사반란을 행동으로 옮기 위한 계락인지 모른 채 그들은 만찬을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의 납치 소식을 듣고 오후 8시경 부대로 복귀하게 됩니다. 같은 시각 김오랑 소령은 아내에게 전화를 걸어 오늘 저녁도 못 들어갈 것 같다는 말과 미안하다는 말을 마지막으로 전화를 끊게 됩니다.
그 전화가 김오랑 소령과 부인의 마지막 통화가 됩니다. 부대로 돌아온 정병주 육군특수전사령관은 특수전사령부에서 신군부에 맞서보지만 이미 군권은 신군부가 장악하고 하나회의 세력들이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정병주 사령관이 평소 자식처럼 생각한 부하 최세창마저 하나회였기에 전두환의 명령에 따르고 있던 상황이었습니다.
전두환 이야기가 궁금하신 분들은 아래 버튼을 눌러주세요 👇🏻
상황을 빨리 끝내려 했던 전두환은 최세창에게 전화를 걸어 정병주 사령관을 체포하라는 명령을 내리게 되고 최세창은 자신의 직속상관인 정병주 사령관을 체포해야 한다는 사실에 망설였지만 이내 지시에 따르게 됩니다.
최세창은 3 공수 15대 대장이던 박종규에게 정병주 사령관의 체포를 지시하며 반항하면 총을 사용해도 된다고 말했습니다.
최세창에게 지시를 받은 박종규는 김오랑 소령과 1974년부터 같은 아파트에 살며 육사 선후배를 넘어 평소 형제처럼 지냈고 12.12 사태 며칠 전에도 김오랑 소령 부부와 함께 저녁 식사를 하던 각별한 사이였습니다.
1979년 12월 13일 0시경 박종규는 병력을 이끌고 특전사사령부로 향했고 병력들이 들어오자 김오랑 소령은 사령관실에 있던 전병주 사령관을 피신시켰습니다.
그리고 김오랑 소령은 홀로 사령관실에 남아 권총 한 자루로 박종규의 병력에 맞서려 하지만 역부족이었습니다.
정병주 사령관을 체포하기 위해 사령부에 들어온 신군부의 총구는 사령관실의 문을 향했고 문 건너편에 맞서고 있던 김오랑 소령은 피할 수 없었습니다.
자신의 상관 정병주 사령관을 지키기 위해 홀로 맞서던 김오랑 소령은 평소 형동생으로 지내던 박종규의 병력으로 인해 세상을 등지게 됩니다. 그리고 옆방에 피신해 있던 정병주 사령관 역시 그들에 의해 팔에 총상을 입고 보안사로 압송되었습니다.
1979년 12월 12일 그날의 군사 반란은 전두환과 신군부에 계획대로 되었고 이내 그들은 권력의 중심에 서게 됩니다.
김오랑 소령 부인의 죽음
1212 사태 이후 김오랑 소령의 부인 백영옥은 새로 부임한 정호영 특전사령관에게 남편의 명예를 지켜달라고 요구하게 되고 이듬해인 1980년 2월 김오랑 소령은 국립묘지에 안장되게 됩니다.
하지만 김오랑 소령 가족의 비극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김오랑 소령의 어머님은 아들을 잃은 지 2년 뒤 세상을 떠나게 되고 삼촌과 큰형도 애통해하다 세상을 등지게 됩니다.
부인 백영옥은 마지막은 더욱 안타깝습니다. 평소 앓고 있던 시력약화증은 김오랑 소령이 세상을 떠난 후 더욱 심해져 시력을 완전히 잃게 됩니다.
이후 백영옥은 1983년 고향 부산으로 내려가 자비원이라는 복지기관에서 전화상담봉사를 하며 지내게 됩니다. 앞이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도 김오랑 소령의 명예회복을 위해 1계급 특진 서훈 및 보상을 요구하는 청원을 국회에 냈습니다.
그녀의 노력으로 국방부는 1990년 2월 김오랑 중령 진급을 추서 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듬해인 1991년 6월 김오랑 소령의 아내는 자신이 봉사하던 자비원 건물 아래 주차장에서 의문을 남긴 체 싸늘한 모습으로 발견되었습니다.
김오랑 소령을 기억해야 하는 이유
12.12라는 역사의 비극 속에서 김오랑 중령 시간이 많이 흐른 지금 우리는 그를 끝까지 군인으로서 임무를 완수하고자 했던 시대의 참군인으로 기억해야 합니다.
'인물 이야기 > 역사적 인물'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전두환 이야기 서울의 봄 전두광 (1) | 2024.01.01 |
---|---|
김재규 이야기 서울의 봄 김동규 (0) | 2023.12.26 |
정승화 참모총장 이야기 서울의 봄 (1) | 2023.12.18 |
장태완 장군 인생 이야기 (0) | 2023.12.1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