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에서 가장 존경하는 재벌 1위 한때 세계 재산 순위 했던 현대의 창업주 정주영 회장의 인생 이야기
흙수저의 신화
정주영은 1915년 강원도 통천군 아산리 출생으로 풍족하지만은 않은 중농의 6남 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나 3년간 서당 선생님이었던 할아버지에게 한학을 배웠습니다.
1930년 소학교를 2등으로 졸업했는데 집안 사정으로 진학하지 못하게 됩니다.
그래서 최종학력이 겨우 초졸이었지만 그래도 당시엔 초등 교육의 의무가 없어 1920년 4.4% 1930년엔 17%였으니 당시 기준으론 나름 고학력자였습니다.
가출
초등학교를 졸업한 정주영은 새벽 다섯 시면 일어나 아버지와 농사를 짓고 농사일이 끝나면 날마다 2km 밖에 있는 이장 집으로 찾아가 동아일보에 소설 이광수의 흙을 읽으며 막연히 변호사를 꿈꿨다고 합니다.
그래서 정주영은 "평생 허리 한 번 제대로 못 펴고 죽도록 일해도 배불리 밥 한번 못 먹는 아버지처럼 고생만 하다 늙어 죽고 싶진 않았다"며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해 청진의 제철 공장 건설에 노동자가 필요하다는 동아일보 기사를 보고 무작정 가출을 단행합니다.
청진으로 갈 돈이 없던 아끼고자 청진으로 걸어 올라가다가 입에 돈은 벌어야 했기에 원산 부근 철도 공사 현장에서 흙을 날랐는데 정주영의 뒤를 밟은 아버지에게 허무하게 들통나고 끌려가게 됩니다.
그리고 두 번째 가출은 금강산 자락에 있던 작은 할아버지 집에 연락을 받은 또다시 붙들려 허무하게 실패했습니다.
의지의 정주영 이번엔 아버지가 소를 판 돈 70원을 훔쳐 경성으로 속성으로 회계원이나 경리원으로 취직할 수 있다고 했던 부기학원에서 사법고시를 2번이나 낙방하고 정주영이 미쳐 챙겨 나오지 못한 부기학원 입학 안내서를 찾아낸 아버지와 덕수궁에서 마주치게 되는데
그때 다시는 가출하지 않겠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덕수궁에 있는 동물원을 구경하고 합니다.
그런데 한다면 하는 사나이 불굴의 정주영은 "나를 기어이 고향에 붙잡아두려 했던 아버지의 집념도 고향에서 탈출하고야 말겠다던 나의 지예 사는 아니었다"며 1933년 19살이 되던 해에 친구에게 50전을 빌리고는 4번째 가출을 감행합니다.
빈대에게 배우다
하지만 인천에서의 일은 하역부터 이삿짐 나르기까지 죽을 둥 살 둥 일해도 입에 풀칠밖에 하지 못했고 하루 종일 힘든 일을 하고도 숙소에 빈대가 들끓어잠을 제대로 잘 수가 없었습니다.
정주영이 빈대를 피해 식탁 위에 올라가서 잠을 청했지만 빈대는 몇 시간도 못가 식탁의 다리를 타고 올라와 정주영을 물었고 생각 끝에 식탁의 네 다리에 물을 담은 양재기를 하나씩 넣고 잠을 청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방법으로 이틀째 되던 밤 하도 간지러워 불을 켜보니 빈대들이 벽을 타고 사람 몸으로 뚝뚝 떨어지는 걸 본
정주영은 "빈대도 먹고 살기 위해 죽음을 걸고 기어오른 있을까? 내가 빈대보다 못해서야 되겠나?
라고 생각하고 그날로 경성으로 상경해 막노동을 전전하다 고생 끝에 1934년 복흥상회라는 쌀가게 배달원으로 취직하게 됩니다.
결혼
그러던 1935년 정주영은 삼촌의 중매로 고향 이웃 마을 여인과 선을 보게 됩니다.
훗날 정주영의 부인 변중석 여사는 그날을 윗마을 총각이 서울서 선을 보러 내려왔다고 하니 방에서 나오지도 못하고 떨고 숨 죽인 채 바깥을 살피고 있는데 갑자기 어떤 총각의 굵직한 목소리가 들리더니 방문이 확 열렸어요
놀란 변중석 여사는 머리를 숙였고 정주영은 아내가 될 사람의 머리만 잠깐 쳐다보곤 그대로 나가버렸으며 한 달 반 뒤 결혼했습니다.
변중석 여사는 첫날밤을 기억하며 "무슨 사람이 이렇게 크고 무섭게 생겼나!" 하는 생각만 들었다고 합니다.
결혼 후 곧바로 복흥상회로 간 정주영은 안정적인 일자리인 데다 하루에 세끼를 주고 가게에서 잠도 잘 수 있었으며 무엇보다 월급이 쌀 한 가마니는 주니 그때 서야 고향 떠나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합니다.
세 번째 가출에서 부기 학원에 다녔던 정주영은 장부를 관리하며 주인의 신임을 얻었고 노름에 빠져 재산을 탕진하는 아들에게 지쳐버린 주인이 성실한 정주영에게 가게를 물려줬다고 합니다.
"지금 저축한 것만 먼저 주고 나머지는 벌어서 갚아 그동안 하던 것처럼 성실히만 하면 단골들만 그대로 물려받아도 금방 성공할 걸세"
주인의 파격적인 제안에 정주영은 1938년 제일이라는 뜻의 경일 상회를 간판에 걸고 트럭 한 대를 사서 농촌을 다니면서 직접 쌀을 구입해 와서는 도매도 겸하며 나날이 성장했습니다.
그런데 1940년 중일 전쟁이 터져버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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