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병철의 셋째 아들로서 첫째와 둘째형을 제치고 회장이 되었습니다
현재는 고인이 되어 아들인 이재용 부회장이 회장직을 수행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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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2년 1월 9일 일제강점기 당시에 태어났습니다
일본에서 초등학교를 다니고 이때도 형과 함께 자취 상활을 해서 이 시기 이건희 남매가 부모와 모두 모인 자리는 손에 꼽을 정도로 적었습니다.
이병철 회장이 워낙 바쁘던 시절이니까요
이러한 환경때문인지 어릴 때는 상당히 말수가 적고 보통 사람들과 어울리기보다는 혼자서 놀고 사색하는 시간이 많았습니다. 그러다 다시 한국으로 와 부산 사범 부부 속 국민학교를 다녔는데 이때 4학년과 5학년을 같이 다닌 권근술 전 한겨레 사장 증언으로는 부잣집 도련님이라 장난감을 많이 가져와 놀았는데 말이 없고 장난도 잘 안치던 아이라 기억이 잘 안 난다고 했죠
고등학교는 서울사대부고를 진학했는데 동창이던 홍사덕 전 의원이 인터뷰한것에 따르면 미국에서 차관을 많이 들어와야 이해관계 때문에 안보가 튼튼해진다. 공장을 지어서 일자리를 많이 만드는 게 애국하는 길이라는 등 고등학생이 생각하기 힘든 말들을 많이 했다고 합니다.고등학교 때도 딱히 말이 없고 느릿느릿했는데 무슨 생각을 하냐고 물어보면 자신은 사람 공부를 한다라고 대답하곤 했다고 합니다이병철회장이 임원중 한 명을 쫓아냈던 일이 있었는데 고등학생 이건희가 아버지를 찾아가 설득하자 이병철 회장이 두말 않고 그 임원을 다시 불러들인 일화가 있습니다.
이걸 보면 어릴때부터 사람 보는 눈을 이병 철회 정에게 인정받고 있었던걸 알 수 있겠죠 공부에는 별 뜻이 없었던 건지 성적은 중간도 안되었습니다.이후 연세대 상학과 현재의 경영학과 경제학과에 입학했다 자퇴하고 화세다대학 상학부에 진학해 졸업을 합니다와세다 대학 시절 전자 제품을 사다가 뜯어보는 취미를 갖게 되었고 이로 인해 자원이 없는 한국이 선진국 틈에 끼여 경쟁하려면 부가가치가 높은 전자산업을 해야겠다고 생각하죠 아름대로 뜻 깊은 유학생활을 보냈으며 일본이라는 나라를 통해 선진국에 대해서 배우게 됩니다, 복무에 대해서는 이야기가 엇갈리고 있습니다
강용석은 이건희가 정신질환으로 면제받았다는 주장을 했죠 하지만 그 근거는 제대로 된 사실이 아니었고 한겨레 신문의 취재에선 만기 전역은 아니지만 복무를 했다는 보도가 있습니다 한편 삼성그룹 측에선 이건희 회장은 육군 병장 만기전역이라고 공식 발표를 했죠
1966년 10월 동양방송에 입사한뒤 68년 주식회사 중앙일보 동양방송 이사 78년 삼성물산 주식회사 부회장, 80년 중앙일보 이사를 거쳐 1987년 12월 삼성그룹 회장이 됩니다. 이병철 회장의 셋째 아들인 이건희 회장이 장남도 아닌데 삼성을 물려받은 것이 전통적인 재벌 구조에선 좀 의아할 수 있죠이는 1969년 이맹희와 이창희가 아버지를 청와대에 고발하는 사건 일명 왕자의 난을 일으켰기 때문입니다.그 결과 이맹희와 이창희가 집압당해 내쳐졌죠 하지만 이건희 본인이 나름 능력을 보여준 덕도 있습니다.
이건희는 어렸을 때만 해도 형이 두 명이나 있어서 삼성의 회장이 될 거라는 생각을 못했지만 이맹희의 무능과 이창희의 반란 등으로 인하여 자연스럽게 이건희에게도 기회가 온 거죠 이건희는 이병철 회장이 마으에 들 정도로의 업무성과를 내면서 후계자로 거듭납니다. 특히 동양방송을 전두환에게 뺏기기 전까지는 드라마 부분을 직접 챙겨서 키웠을 정도로 의욕적이었고 성과도 꽤 좋았죠 삼성그룹 내부 경영진과 이병철 회장의 반대에도 개인판단으로 한국 반도체를 인수하고 지속적인 설득으로 삼성 그룹 차원의 투자를 이끌어 냈는데 이것이 현재 삼성전자 반도체 사업부가 됩니다.
삼성그룹 창업 50주년이 되는 1988년에 삼성의 제 2창업을 선언하고 인간 중심 기술 증시 자율경영 사회공헌을 경영의 축으로 삼아 세계 초일류 기업으로 도약을 그룹의 21세기 비천으로 정하죠 하지만 1990년대 초반 삼성은 위기의식을 갖지 못한 채국내 제일이라는 자만에 빠져 있었고 이건희 회장은 우리는 자만심에 눈이 가려져 위기를 진정 위기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대로 가다간 망할지도 모른다는 위기를 온몸으로 느끼고 있다내가 등허리에 식은땀이 난다고 지적합니다.
1993년 2월 전자 관계사 주요 임원이 참석한 가운데 미국 LA에서 전자부분 수출상품 현지 비교 평가회의를 주채하죠합니다삼성이 잘한다고 자부하며 만든 제품들이 세계 최대 시장인 미국에서 어떤 대우를 받고 있는지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해보자는 취지였습니다. 삼성제품은 외면받아 한쪽 구석에 먼지를 뒤집어쓴 채 놓여 있었다고 합니다 임원들과 함께 이를 둘러보며 이건희 회장은 삼성이란 이름을 반환해야 한다 한쪽 구석 먼지 구덩이에 처박힌 것에다 왜 삼성이란 이름을 쓰는가? 그나마 진열대에 놓여 있는 제품 중에는 뚜껑이 깨져 있거나 작동이 안 되는 것도 있지 않은가? 이는 주주 , 종업원, 국민, 나라를 기만하는 행위다.라고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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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삼성이 만든 제품은 동남아 등 일부 시장에서 부분적으로 성공을 거두고 있을 뿐 미국, 일본 등 선진국 시장에서는 싸구려 취급을 받고 있었으니까요. 이건희 회장은 이런 수준으로는 글로벌 시장에서 살아남을 수 없겠다고 생각했죠. 이대로 있으면 삼류, 사류로 전락하고 망할지도 모른다는 절체절명의 위기감을 전 임직원이 공감하고 대전환의 길을 선택할 것을 바랍니다. 그것은 양이냐 질이냐의 선택이었고국내 제일에 머물 것인가 세계 시장으로 나가 초일류로 도약할 것인가의 선택이기도 했죠
마침내 1993년 6월 7일 이건희 회장은 비장한 각오로 임원과 해외 주재원 등 200여 명을 프랑크푸르트 캠핀스키 호텔로 불러새로운 삼성을 여는 회의를 주재합니다, 여기서 이건희 회장은 신경영을 선언하죠
여기서 신경영이란 이제까지 지속되었던 양 위주 경영의 악순환 고리를 끊고 질의 중심으로 양이 조화를 이루는 선순환의 경영구조를 실현하겠다는 말입니다. 이에 양 위주의 경영에서 생기는 불량을 뿌리 뽑기 위해 1995년 애니콜의 휴대폰이 다수 품질이 낮은 것을 확인하고 구미공장 앞마당에서 15만 대 상시 돈 500억 상당의 휴대폰을 전부 불태워버립니다이러한 '신경영'을 통해 획기적인 경영혁신을 추진해 나갔고 삼성전자를 세계 인류 기업으로 도약시킵니다.이 과정에서 정말 유명한 말이 있죠극단적으로 얘기해 농담이 아니야 마누라 자식 빼놓고 다 바꿔봐 이건희 회장은 그룹 회의에서 심심하면 위기라고 말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매출이 100조를 넘어도 시장 흐름이 바뀔지 모르니 걱정 매출이 줄면 줄었다고 걱정, 이렇게 항상 경각심을 늦추지 않는 게 여러 CEO들의 특징이기도 하고 , 삼성 성장의 비결 중 하나이 기고합니다.
이건희 회장은 경영자들에 대해 항상 강조하는 게 인간미입니다. "삼성인의 자세로 뛸 사람은 뛰고, 앉아 있을 사람은 앉아 있어라 그러나 뛰는 사람은 앉아 있는 사람을 무시하지 말고 잘 쉬었다가 너도 잘 뛰어라고 격려해 줘라 앉아 있는 사람은 뛰는 사람을 질투하지 말고 박수를 치면서 나도 빨리 체력을 회복해서 다시 뛰어야지라고 생각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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